“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영화 ‘남한산성’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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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영화 ‘남한산성’을 보고
  • 발행인 정태철
  • 승인 2017.10.09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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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행인 정태철
발행인 정태철

영화 <남한산성>을 봤다. 책에서만 배웠던 ‘삼전도의 굴욕’의 전후 맥락과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직접 영상으로 보니, 그 처참함이 가슴을 저몄다. 삼배구고두례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는 것’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세 번 절하고 나서 머리를 아홉 번 찧는다는 건지, 머리를 찧는다는 게 어떻게 하는 것인지가 궁금했다. 이 영화는 한 번 절하고 엎드린 상태에서 머리를 흙바닥에 닿게 세 번 찧는 동작을 1세트로 3회 반복하는 것으로 ‘친절하게’ 보여주었다. 학문적 지식의 ‘설명’보다 때로는 예술이라는 영화 또는 소설이 역사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남북 이데올로기 갈등을 다룬 논문보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이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처럼.

그러나 영화 <남한산성>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드라마로 각색된 소설을 다시 영화화한 것이므로 실제 사료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병자호란에 관련된 몇 가지 역사적 개념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서울대 국사학과 송기호 교수는 저서 ‘우리역사읽기’ 시리즈 7권 <강 넘고 바다 건너>에서 “역사는 일방적으로 미화할 일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비판할 일도 아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할 대상”이라며 역사가의 (왜곡된) 목소리가 아닌 사료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역사의 실상을 보여주는 일은 그게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가리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화 <남한산성>은 조선의 왕이 곤룡포를 벗고 남색 신하의 옷을 입고서 청 황제 앞에서 무릎 꿇고 이마를 땅에 찧어야했던 부정적 치욕의 역사를 보여주려고 한 점에서 소위 ‘국뽕 영화’와는 다르게 보였다.

올해 4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주석이 미중 정상회담 자리에서 “과거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발언을 했다고 공개했다. 이를 두고 한미중 3국 외교가는 서로 발언 여부를 두고 티격태격했다.

송기호 교수는 조선이 중국에 사대(事大)한 사실과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었는지의 문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중국은 만리장성을 사이에 두고 북방 유목민과 수천 년 동안 대립 상태였다. 여기서 한반도가 어디에 붙느냐에 따라서 전세가 중국과 북방 유목민 둘 중 하나에 불리해지므로 서로 한반도를 사전에 단속해 놓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한 무제가 고조선을 쳤고,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으며, <남한산성> 영화에서 그린 것처럼 여진(청)이 명나라를 치기 전에 조선의 항복을 받아 놓은 것이라고 했다. 양쪽의 위협에 놓인 조선은 어느 쪽이든 대국을 섬기는 사대를 했으며, 이는 나라와 백성을 보존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강 넘고 바다 건너>에는 사헌부가 왕에게 사대주의에 대해 고하는 내용을 담은 <명종실록> 한 부분이 인용되고 있다. “고려시대에 남쪽으로 송나라를 섬기고 북쪽으로 금나라를 섬겼는데, 송나라에 조회(알현)할 때에는 금나라 섬기는 것을 숨기고, 금나라에 조회할 때는 송나라를 섬기는 것을 숨겼습니다. 원칙으로 따지면 올바르지 못하지만, 임시방편으로 논한다면 백성을 보호하는 길을 잘 선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그렇게 하지 않고 송나라만 섬기면서 금나라와 관계를 끊었다면, 온 나라 백성이 모두 생선 고기처럼 결딴이 났을 것이니, 고려가 어찌 500년이나 지속된 뒤에 망했겠습니까?”

이 책은 또한 <성호사설>로 유명한 이익의 사대관을 다음과 소개했다. “...우리나라는 강역(영토)이 (중국과) 아주 가깝게 붙어 있다. 게다가 대소와 강약에서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게 차이가 난다. 그러나 비록 관중이나 제갈량이 이 땅에 태어난다 해도 (사대는) 실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조선이 중국에 사대했다는 것이 곧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책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토론하는 중국 측 문헌을 소개한다. “조선은 본디 속국이다. 그러나 국가(명나라)에서 강토를 차지하지 않고 그 조세를 징수하지 않으니 내지(지방정권)와는 다르다...중국에서 외국(조선)에 수자리를 두는 것(군대를 상시 주둔시키는 것)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우리는 군사와 군량을 지원하여 소국(조선)을 구원하는 자애를 보이면 된다...”

우리는 여기서 중국 스스로 조선을 속국이라 규정하면서도 지방정권도 아니고 조세도 받지 않는 외국이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송 교수의 부언에 따르면, 당시 동양의 속국의 의미는 근대 서양의 속국(종속국)의 의미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근대 서양의 속국은 ‘명분상은 독립국이지만 실제로는 타국의 지배를 받는 나라’를 뜻하며, 조선시대의 속국은 이와는 반대로 ‘실제로는 독립국이면서 명분상은 중국의 지배를 받는 나라’를 가리킨다고 했다. 만약 시진핑이 정말로 한국이 과거에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했다면, 이는 ‘실제로 독립국’이었던 조선을 서양의 개념처럼 ‘실제로 속국’이라고 표현한 잘못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4년 5월, 각 언론은 한중 정부 관계자 정기 교류 모임에서 중국 측 관리가 우리 정부 사람들에게 “조공 외교로 돌아가는 게 어떠냐”는 뉘앙스의 말을 던져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여기서 조공(朝貢)이나 책봉(冊封)이란 무슨 뜻인가? 송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중국은 이집트, 페르시아, 그리스처럼 자기들이 세계의 중심이고 그 나머지 나라들은 자기 아래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중국은 주변국의 대등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큰 나라인 자기들을 섬기면 그 대가로 작은 나라들의 안전을 보장해주겠다는 주종관계를 무력 같은 국력을 앞세워 강요했다는 것이다. 대개는 정복의 결과로 그런 외교와 정치 질서의 상하관계 내지는 주종관계가 형성되는데, 이는 세계사의 보편적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외교적 상하관계를 구체화하는 제도가 조공과 책봉인데, 조(朝)는 황제를 알현하는 것, 공(貢)은 선물을 바치는 것, 책(冊)은 벼슬을 주는 것이고, 봉(封)은 토지를 주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실제 약육강식의 세계 역사는 조공 받는 나라의 지배와, 조공 바치는 나라의 피지배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당나라의 예를 들면, 발해, 고구려, 백제, 신라, 일본, 진랍(크메르), 참다(베트남), 스리비지야(인도네시아 지역) 등이 당나라에 조공을 하거나 책봉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나폴레옹도 로마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받았으니 이는 책봉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공과 책봉이 외교상 상하관계의 표시이지 하위 국가가 상위 국가의 일부(속국)라는 주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을 제외하고는 발해,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등의 왕들은 중국으로부터 벼슬을 받은 적이 있으나, 받은 벼슬은 중국과 해당국과의 상하관계를 상징할 뿐 그 벼슬에 따른 업무가 수행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한다. 따라서 고구려 왕이 중국 벼슬을 받았다고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송기호 교수는 중국 학회에 갔다가 중국학자가 책봉 사실을 들어 고구려가 당나라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하자, “그럼 백제, 신라도 (당나라로부터 벼슬을 받았으니) 당나라 지방정권으로 다 가져가라!”고 호통을 쳤더니 그 중국학자는 아무 반론도 하지 못하더란 에피소드를 그의 책에서 전하고 있다.

<강 넘고 바다 건너>에 따르면, 삼전도의 굴욕 이후, 조선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청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서 송시열 중심의 대청(對淸) 복수론 내지는 북벌론(北伐論)이 등장했고,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청은 “상국(上國)이 아니고 중화도 아니다”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송시열을 추모하는 화양서원에는 임진왜란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 황제를 제사지내는 만동묘(萬東廟)가 있는데, 이는 ‘만 번 굽어도 물은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으로 명에 대한 충성심을 상징한다고 한다. 특히 만주족의 변발은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는 우리 정서와 안 맞아 거부감이 심했다고 한다. 결국, 송 교수는 조선 후기 200년은 과거 명나라의 입장에서 현실의 청나라를 거부한 정서가 지배적이었다고 보았다.

<남한산성>에서 인조는 한양도성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숨었다. 송 교수는 평지가 넓은 중국은 평지에 높게 성을 쌓았지만, 우리는 산에 산성(山城)을 많이 쌓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에 산지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남을 공격하기보다는 방어에 치중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결과, 우리 고대 국가들은 거주하는 성(평지의 읍성)과 피난하는 성(산성)을 옆에 둔 방어체계를 가졌다고 한다. 중국 지안의 고구려 국내성과 환도산성, 평양의 안학궁과 대성산성, 조선의 한양도성과 남한산성, 동래읍성과 금정산성, 청주읍성과 상당산성 등이 모두 평소에 거주하는 성과 전시에 피난하는 산성이 짝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산성의 존재는 우리 민족이 평화를 사랑한 면도 보여주지만 지나치게 방어적인 국방관의 표출이기도 하다.

또 중국 등 다른 지역이 흙이나 흙과 벽돌을 혼합해서 성을 쌓은 반면, 우리는 주로 돌로만 성을 쌓았다고 한다. 흙 속에서 대포알은 제 구실을 못하지만, 돌성은 대포 한 방에 힘없이 무너지고 만다. 영화 <남한산성>은 청의 대포 공격에 힘없이 무너지는 남한산성의 모습을 애처롭게 그리고 있다.

오늘날 청을 중국으로, 명을 미국으로 대치하면, 청이냐 명이냐의 우리나라 과거 딜레마가 요새는 중국이냐 미국이냐의 형국과 유사해진다. 수천 년이 흘렀어도 우리 한반도가 강자들의 맷돌 사이에 끼인 운명은 변한 게 없다.

최근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 중국보다 처음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시절을 맞고 있다고들 한다. 국가총생산으로 보면, 중국이 세계 2위인 것은 맞지만, 1인당 국민소득은 우리가 훨씬 많다. 한 10년 전 중국 대학 교수 월급이 우리 돈 50만 원 정도라고 직접 중국 교수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중국 대학 기숙사를 방문했더니, 기숙사 방 옷장이 나무 무늬가 그대로 드러난 합판으로 짜여 있었다. 대학 본관의 화장실이 재래식이었고, 대학 본부 사무실에는 석유난로가 놓여 있었다. 한국 대학을 자주 다니는 중국 대학 관계자들은 한국에 비해 열악한 중국 대학 시설을 한국 일행에게 보여주는 것이 창피하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한 번은 중국 대학 손님들을 모시고 부산의 국제시장으로 쇼핑하러 갔다가 우리 상인들이 ‘이런 비싼 것을 당신 중국 사람들이 살 수 있느냐’는 식으로 듣기 거북한 말을 해서 서둘러 시장을 빠져 나온 적도 있었다. 요새 한국인들의 중국인 무시는 시장통에서 다반사다. '삼전도의 굴욕'의 되갚음이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의 ‘치맥 광풍’이나, 한국 TV 프로그램 따라 하기 등에서 보듯이, 최근의 한국의 경제, 문화 상황은 대국굴기를 외치는 중국의 자존심을 박박 긁고 있다. 책봉, 조공, 사대, 속국의 역사적 의미를 다 버리고, 중국은 작심하고 최근 기고만장하는 한국을 길들이려고 하고 있다. 사드 배치로 인한 우리 기업 억누르기가 그런 맥락의 증거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는 강자들 사이에서 먹잇감 신세가 되고 있고, 이 사태 속에서도 정치인들은 대책 없이 명분 싸움 중이며, 나중에 다치고 고생하는 건 백성일 것이라는 우려가 감돈다. 영화 <남한산성>의 최명길과 김상헌은 각자의 입장은 다르지만 사심 없이 나라를 구하려는 진정한 애국적 정치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현실에도 그런 정치인들이 있기를 희망해 본다.

<남한산성> 영화를 보고 무거운 마음으로 극장을 빠져 나오는데, 뒤에서 한 여성 관객이 “재미 하나도 없다. 졸려서 혼났다”고 남자 친구에게 불평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런 악평은 속으로 하면 안되나? 하고 눈살을 찌푸렸는데, 이어서 다른 여성 관객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는 살아서 죽는 게 좋아, 죽어서 사는 게 좋아?” 대답은 영화를 본 관객 각자의 몫이겠지만, 그래도 역사의식이 있어 보여서 이 소리는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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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빅뉴스 2017-10-10 05:24:45
수정했습니다.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아무개 2017-10-09 22:54:51
저기, 광장을 쓴 이는 이청준 작가가 아니라 최인훈 작가인줄로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