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올림픽 뒤 우리는 또하나 대형 ‘흰 코끼리’의 부담을 안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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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올림픽 뒤 우리는 또하나 대형 ‘흰 코끼리’의 부담을 안아야 한다
  • 논설주간 강성보
  • 승인 2017.09.20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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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설주간 강성보
논설주간 강성보

중견 기자 A 씨는 몇 년 전 한 언론인 재단의 지원을 받아 미국 단기 연수를 떠날 기회를 가졌다. LA, 뉴욕 등 대도시의 명문 대학을 다닐 수 있었으나 어차피 한 번 하는 어학연수, 영어 한번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한국인들이 거의 없는 미국 중부 도시의 작은 대학을 택했다. 그런데 평소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했던 A 씨였지만 책으로 배운 것과 현지인들의 영어는 사뭇 달랐다. 교수님들이 강의 말미에 늘 하는 “대찌, 대찌”라는 말이 한국어 “됐지?”가 아니라 “That’s it!(이제 강의 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크리스마스를 몇 주 앞둔 어느날 A 씨는 자신이 다니던 교회 목사님(물론 현지인)이 설교를 마치면서 “성탄절 자선행사를 열 참이니 다음 예배 시간엔 ‘화이트 엘리펀트(white elephant)’를 가져오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화이트 엘리펀트? 흰 코끼리라니 참 이상하네. 진짜 동물 코끼리를 끌고 오라는 것은 아니겠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얼핏 얼마전 기념품 가게에서 본 사기로 만든 흰 코끼리 미니어처가 떠올랐다. 그 가게를 찾아 물어보니 무려 80달러라고 했다. 유학생 처지에 꽤 부담되는 돈이었으나 신앙심 깊은 A 씨는 목사님 지시를 거스를 수 없다는 생각에 호쾌하게 지갑을 열었다.

그런데 다음 일요일 교회에 가서 보니 자기처럼 코끼리를 들고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교인들이 가져온 물품들을 보니 낡은 점퍼, 중고 골프채, 말끔했지만 장기간 사용했던 것이 분명한 주방용품 등이었다. 무슨 연유인가 싶어 목사님에게 물었더니 환한 미소와 함께 “화이트 엘리펀트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생활용품을 말합니다. 버리기는 아깝고, 그냥 두자니 쓸모가 없어진 것들이죠. 다른 사람에게는 필요할 수도 있으니 성탄절 때 모아 자선 바자를 엽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A 씨는 이 에피소드를 전하면서 “영어 한토막 배우는데 꽤 비싼 수업료인 셈”이라며 쓴 웃음을 지었다.

흰 코끼리(白象)는 유전적으로 멜라닌 색소가 없는, 일종의 변종이지만 불교에서 매우 신성시되는 동물이다. 석가모니는 카필라 왕국의 마하마야 왕비가 어금니 6개를 가진 흰 코끼리 꿈을 꾼 뒤 낳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석가모니가 어머니께 설법하기 위해 도리천에 올라갈 때 타고 간 것도 흰 코끼리였다. 불교 탱화에서 보면 석가여래를 오른쪽에서 모시는 보현보살은 흰 코기리를 탄 모습이 많다. 일찍이 불교가 전파된 미얀마, 태국 등 동남아에서 흰 코끼리는 왕의 권위와 힘의 상징이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17~18세기 미얀마의 수도 아마라푸라에는 흰 코끼리를 모신 거대한 사원이 있었다고 한다.

흰 코끼리는 불교나 동남아 국가에서 신성시되는 동물이다. 그러나 가치에 비해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드는 물건을 의미하기도 한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그런데 옛날 태국의 왕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가 있을 때 흰 코끼리를 하사해 골탕을 먹이곤 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신하가 흰 코끼리를 하사받으면 그것은 한마디로 애물단지가 된다. 일을 시키지도 못한다. 그냥 고이 모셔야 한다. 맛있는 음식을 매끼 제공하고 잠자리도 불편한 게 없는지 살펴줘야 한다. 별도의 황금 궁전이나 사원, 전용 요리사까지 두기도 한다. 그런데 흰 코끼리는 먹기도 많이 먹고 수명도 길어 다른 코끼리에 비해 엄청나게 오래 산다고 한다. 이 흰 코끼리가 만일 자연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신하는 왕의 하사품을 소홀히 한 죄로 엄한 처벌을 받는다. 진퇴양난의 그 신하,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파산하기 마련이다.

이런 전설에서 연유된 것이 ‘흰 코끼리의 역설’이다. 값비싼 것이지만 쓸모없는, 가치에 비해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드는 물건이나 시설을 의미한다. 주로 올림픽, 월드컵 등 큰 스포츠 이벤트를 위해 만들었다가 이벤트가 끝난 뒤 쓸모없이 내팽겨친 시설을 지칭한다.

평창 올림픽 유치가 확정되자 유치단이 환호하고 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지난 14일 페루 리마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구닐라 린드버그 IOC 조정위원장이 “2018 평창 올림픽 경기장에 흰 코끼리가 남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올림픽 시설에 대한 사후 활용방안을 충분히 고려해두라는 충고다. 그러나 평창 슬라이딩 센터나 강릉 스피트 스케이팅 경기장, 아이스하키 경기장 등 수십~수천 억 원씩 들여 조성한 시설들이 올림픽 후 애물단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특히 평창 메인 스타디움은 올림픽 개폐회식과 패럴림픽 개폐회식 나흘간만 사용되고 버려질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지역 사정 상 적절한 활용할 방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 시설의 관리비만 해도 매년 수십 억 원씩 소요될 전망이다. 당초 평창 올림픽을 유치했을 때 이런 ‘흰 코끼리의 저주’에 걸릴 것이 예상돼 부산 등 다른 대도시에 분산 개최가 고려됐지만 평창 브랜드의 제고를 기대한 지자체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제 와서 이런 분산 개최 운운하는 것 자체가 사후약방문,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 격이다.

평창 동계올림픽 엠블렘(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대한민국에는 이미 이런저런 ‘흰 코끼리’가 많다. 각 지역 홍보관, 향토 박물관, 어정쩡한 테마파크, 녹슨 경전철, 짓기는 지었는데 운행도 못하고 부셔야할 운명의 은하철도, 이용객이 거의 없어 매일 파리만 날리는 지역 공항 등이다. 수십 억, 많게는 수천 억 원씩의 국민 세금이 줄줄 새어나가고 있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이후 남겨진 시설들도 인천광역시 재정에 깊은 주름살을 만들어 놓고 있다.

물론 평창 올림픽은 지구촌의 잔치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번 뉴욕 방문에서 강조한 대로 우리 민족의 평화 역량을 세계에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 내년 평창 올림픽이 끝나고 철 지난 바닷가처럼 세계인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엔 또 하나 대형 ‘흰 코끼리’만 덩그렇게 남아 우리들에게 무거운 짐을 안겨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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